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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옴니버스

영원한 홍콩영화의 상징 '이소룡(Bruce Lee)' 리즈시절

by memewave 202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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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ce Lee' 홍콩영화 전설의 배우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이지만 요절하였다.

수많은 미스테리가 많았지만,  공식적인 사인은 복용 약품 부작용과 뇌부종으로 사망했다.

 

 

이소룡 (李小龍) Bruce Lee

본명 : Lee Jun-fan
李振藩 (리전판:중국어, 레이전판:광동어, 이진번:한국어)

 

출생 : 1940년 11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사망 : 1973년 7월 20일 (향년 32세) 영국령 홍콩 까우룽통
활동 : 1941년 – 1973년
데뷔 : 1941년 영화 'Golden Gate Girl'

 

이소룡이 사망하고 수많은 영화에서 오마쥬되었다.

 

 

어린 시절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과 중국+영국 혼혈 어머니 하애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하애유가 홍콩의 4대 명문 가족 중 하나인 하동가족의 자손 중 하나라고 한다. 명문가의 자손인 셈이다.

 

 

출생 이후에는 부모님의 고향인 홍콩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직업 덕분에 이소룡도 매우 이른 나이에 데뷔했는데, 갓난아기 시절부터 영화에 나왔을 정도였고 아역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다. 

성인이 된 이후의 강인한 이미지와는 달리 어릴 적에는 몸이 몹시 연약해서 잔병을 달고 살다시피 했다고 하며, 7살 되던 무렵 신체 단련을 위해 태극권을 연마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술에 입문하게 됐다.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이 과거 홍가권을 배웠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무술의 기본이 된 영춘권을 엽문에게 배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엽문에게 배운 적이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상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가르쳤던 이는 엽문의 제자인 황순량(黃淳樑)이었다. 

 

 

문제아였다. 일진과 학폭 이소룡

어릴 때는 TV 등에서 아역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해서 인기도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골목대장에 가까웠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부모조차도 어떻게 손을 써 볼 수가 없는 불량학생이며, 매일같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시 유행하던 차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탈은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 삼합회 간부의 아들과 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경찰이 찾아와서, “한 번만 더 당신 아들이 싸움을 벌인다면, 녀석을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1959년 4월, 부모는 이소룡에게 100달러를 쥐어주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이해천의 누나, 이추봉에게 보냈다고 한다.

 

 

 

미국으로 도미 후

고교 과정을 마치고, 1961년, 워싱턴 대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간다.

영춘권을 비교적 오래 수련했을 뿐, 다른 무술들은 금방 싫증을 내곤 했던 어릴 때와는 좀 다르게 더 본격적으로 복싱, 유도, 사바트, 태권도, 가라테, 말레이시아 권법 등 여러 무술을 접해 나아갔다. 자신의 신체 특성이나 스타일에 맞는 프리스타일 파이팅을 추구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고, 나중에 절권도의 이념이 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무술을 가르치다 제자와 결혼하다.

1959년부터 본인의 이름을 딴 진번쿵후(振藩功夫, Jun Fan Gung Fu)라는 간판을 내걸고 무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당시 인근에 있던 가필드 고등학교라는 학교에 무술 시범 차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 학교 여고생들 중 린다 C. 에머리(Linda C. Emery, 1945~)가 있었다. 그녀는 이소룡의 쿵후 제자가 된 이후 교사가 되려고 이소룡과 같은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1964년 8월 17일에 그와 결혼하면서 졸업까지 불과 몇 학점만을 남겨둔 채로 대학을 중퇴하게 된다.

 


이소룡의 20대 초반 시절, 진번쿵후의 주요 골격은 영춘권을 기반으로 채리불권, 홍가권 등등의 남권에 기반하고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대의 다양한 무술에 비해 건설적인 변화와 발전이 부족했던 중국의 남파권법을 크게 개신(改新)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어 기존의 체계를 없애 버리고 새로 절권도를 만들 때는, 펜싱과 복싱, 레슬링을 조합한 서양 무술 위주의 뼈대를 바탕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

상술되었듯 이소룡은 아버지의 직업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연극을 택할 정도로 배우를 꿈꾼 인물이다. 그러나 1959~1964년까지 열심히 노력했으나 끼니를 걱정하게 될 정도로 난항이 거듭되어 1964년에는 마침내 꿈을 포기하고 무술에 전념하자고 결심하고, 자신의 무술을 홍보하려 인맥을 동원해 롱 비치 가라테 선수권대회에 시범자로 초청받을 수 있었다. 

 

그린 호넷에 출연

그의 무술 시범을 눈여겨본 윌리엄 도지어(William McElroy Dozier)라는 인물이 1964년 그의 기획 《Number One Son》의 배역에 오디션을 보게 도와 준다. 이 시도는 최종적으로 불발되었으나, 밴 윌리엄스(Van Willams)와 함께 TV 시리즈 《그린 호넷》의 케이토(Kato, 加藤)역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아 배역을 따 낸다.

 

이 드라마는 1966~1967년까지 단 한 시즌만 방영되었을 정도로 반응이 신통찮았으나 《배트맨》과의 크로스오버 에피소드에 몇 번 더 출연할 수 있었다.

 

 

 

이소룡 방식의 쿵푸 컬쳐쇼크가 시작된다.
1969년, 이소룡은 스털링이 각본에 참여한 덕에 《말로우(Marlowe)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주인공의 사무실로 찾아와 깽판을 치는 장면에서 감독은 이소룡의 재량에 맡겨 적당히 깽판을 부려 달라고 주문했고, 이에 곧이곧대로 따른 이소룡은 맹렬한 날아차기로 전등을 박살내고 주먹질로 책상을 반토막 내는 등 방 안에 있는 기물들을 짐승같은 몸놀림으로 박살내며 필요 이상으로 그 역할을 잘 수행해 냈다. 이 때 감독, 촬영 스탭, 배우들 등등 모든 인원들이 듣도보도 못한 방식으로 아스트랄하고 과격하게 기물들을 때려 부수는 모습에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제작자 프레드 웨인트라웁(Fred Weintraub)은, 이소룡에게 무작정 기반 없이 활동하려 하기보다는 홍콩으로 돌아가서 할리우드 제작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찍어 와 보라고 충고한다. 쉽게 말하자면 더 나은 환경에서 커리어를 쌓고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결국 홍콩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이소룡은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머지않아 신의 한 수가 된다.

 

다시 간다 홍콩...

 

홍콩 귀국과 대성공

당시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는 왕우(王羽) 주연의 《용호투(龍虎鬪, The Chinese Boxer)》(1970)가 대성공하며 이전의 무협영화, 검술영화가 아닌 맨손, 맨몸으로 싸우는 무술영화가 뜨고 있었다. 친구인 소기린도 이소룡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홍콩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린 호넷》의 케이토 역이 중국인이라는 것이 홍보되었기에 인기가 없어 한 시즌 방영에 그친 미국과는 달리, 중국식 제목은 《청봉협(青蜂侠)》이었지만 홍콩에서 비공식적으로는 《Kato Show》로 알려질 정도로 성공했었다. 이소룡은 이후 자신이 막 홍콩에 돌아왔을 때 홍콩에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서 놀랐다고 술회했다.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이소룡은 홍콩 최대의 영화사인 쇼 브라더스(Shaw Brothers)로 가서 면접을 보았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웬 바짝 마른 건달 비슷한 놈이 미국물 먹었답시고 예의도 안 차리고 건들거리면서 들어와서는 자기를 주연으로 해서 영화 찍으라고 해대니 사장이 불쾌해 하면서 화를 내며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 이소룡을 잡은 게 쇼 브라더스에서 독립해 나와 세운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와 두 편의 영화계약을 체결했다.

 



그의 첫 작품인 《당산대형》(1971)으로 흥행기록을 세워 스타가 되었고 연이어 《정무문》(1972)으로 그 기록을 경신했다. 골든하베스트와 계약을 마무리한 뒤에는 협화전영공사를 설립해 스스로 각본,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을 맡은 《맹룡과강》(1972)으로 다시 신기록을 세웠다.

 

사망

《용쟁호투》 촬영을 마무리하고 몇 개월 후, 7월 26일 개봉을 6일 앞둔 1973년 7월 20일, 그의 애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했던 여배우 정패(丁珮 Betty Ting Pei)의 집의 침대 위에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해서 진통제를 주었는데, 이소룡은 그걸 먹은 후 잠든 뒤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죽음과 그에 얽힌 소문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부검의나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등 상당히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복상사라느니 마약중독사라느니 등등 각종 소문이 무지하게 많지만, 공식적인 사인은 복용 약품 부작용과 그로 인한 뇌부종이다.



상당히 신화적인 인물이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려서 허황된 음모론들이 양산됐다. 

  • 1. 중국 무술계 또는 삼합회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 2. 복상사다.
  • 3. 이소룡 가문의 저주다.
  • 4. 이소룡의 친구였던 이준구는 누군가가 그를 살해한 거라고 주장.
  • 5. 이소룡을 붙잡아 두기 위해 제작자 레이몬드 초우가 미인계와 마약까지 사용하다 부작용으로 숨졌다고 주장했다.
  • 6. 할리우드 백인우월주의자가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죽기 몇 달 전에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었고 아내에게는 내가 죽으면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My Way》, 블러드, 스웻 & 티어스(Blood, Sweat & Tears)의 《And When I Die》등등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장례식 때 틀어달라고 했다. 실제 장례식 때 그가 좋아하던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소룡은 무술가로서 생명이 끊길 정도의 허리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코르티손이라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주기적으로 주입하였고, 이것이 부신성 위기를 초래하여 뇌혈관이 터져 사망에 이르렀다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부검 결과가 발표되었다.
2022년에는 이소룡이 수분 과섭취로 인한 저나트륨 증세로 사망했다는 설이 의사들 사이에서 유력하다고 한다.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이소룡의 무덤. 묘비명은 절권도의 창시자(Founder of Jeet Kune Do). 오른쪽은 그의 아들 브랜든 리의 무덤.

 


주요 출연작

금문녀(金門女, Golden Gate Girl)(1941)

이소룡이 생후 3개월 때 출연한 데뷔작이다.


세로상(細路祥, The Kid)(1950)

이소룡이 아역 시절 첫 주연을 맡아 아버지 이해천과 함께 출연한 작품이다.


그린호넷(The Green Hornet)(1966)

TV 드라마로 명탐정 그린 호넷의 조수이자 운전수인 카토(Kato)역으로 출연.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1971)

이소룡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한 첫 번째 작품. 당시 홍콩에서 역대 흥행 1위이던 《사운드 오브 뮤직》을 제치며 319만 홍콩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다만 이소룡 작품치고는 상당히 잔인한 묘사가 많고 이해가 안 되는 장면, 코믹스런 장면, 짧지만 이소룡의 베드 신도 있을 정도로 이소룡 작품들 중 희귀한 작품이랄 수 있다. 

 

 


정무문(精武門, Fist Of Fury)(1972)

여러 번 리메이크된 작품으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쌍절곤이나 괴조음 등이 등장한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경찰이 극장상영을 미뤄달라고 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성룡은 자신이 이 영화에서 이소룡의 발차기를 맞고 집 밖으로 날아가는 스즈키 관장의 대역을 했다. 스턴트였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전혀 얼굴이 드러나지 않아 이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한 사람이 장비 없이 날아간 거리로는 최고였다고한다.

 

 


맹룡과강(猛龍過江, The Way of the Dragon)(1972)

콜로세움에서 척 노리스와 1대1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게임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패러디되었다. 추정 제작비 13만 홍콩달러, 흥행은 홍콩에서 530만 홍콩달러, 미국, 캐나다에서는 520만 달러.

 

척노리스는 태권도를 사용한다.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1973)

이소룡이라는 배우를 전 세계에 알린 작품으로 워너브라더스사에서 배급. 85만 달러라는 저렴한 제작비[49]를 들여, 홍콩에서 330만 홍콩달러, 미국에서 2,50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9,0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흥행기록을 수립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훗날 가화삼보로 알려지는 성룡, 홍금보, 원표를 비롯한 칠소복 멤버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특히 곤봉에 두들겨 맞고 나가떨어지는 장면에서 이소룡의 실수로 실제로 너무 세게 맞아서 부상까지 입자, 이소룡이 사과의 의미로 다음 영화에서는 성룡을 꼭 조연이라도 영화에 출연시켜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을 정도로 성룡을 이미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소룡의 가장 많은 포스터들이 바로 용쟁호투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1973)

무술고수들과 탑에서 벌이는 마지막 결전이 인상적인 작품. 본래 《사망유희》는 이소룡의 무술철학을 집결시킨 작품이 될 예정이었으나, 일부 격투장면만 촬영한 상태에서 이소룡이 사망하는 바람에 반쯤 미완으로 제작되었다. 쌍절곤과 단봉을 가지고 싸우는 댄 이노산토는 고난에 대처하기 위한 유연함, 합기도의 지한재는 실수에서의 깨달음, 그리고 마지막의 카림 압둘 자바는 무형의 강한 고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망한 이소룡의 대역을 했던 사람은 당룡이며, 원표도 참여하였다. 문제는 대역 배우와 이소룡의 외모가 상당히 차이가 나서, 이를 처리하려다 보니 곳곳에서 다소 괴작스러운 부분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오마쥬되는 사망유희

 

이소룡의 평가

그가 영화인으로서 보여준 모습은 지금도 회자되고, 철학적 면모는 물론, 웨이트 트레이닝을 무술에 도입한 선구자라는 말도 있다. 그의 실제 무술실력은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 논란에 절권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에 관해서는 선후가 뒤바뀌거나, 왜곡 혹은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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